나는 전주에서 실비아를 찾아 헤맸다.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그녀를 찾아,,,

by 파란
[송진권 읽기5] 어떤 지연2-지연의 詩學
[송진권 읽기5] 어떤 지연2-지연의 詩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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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권의 첫 번째 시집 <자라는 돌>(2011) 3부는 ‘못골 연작’으로 가득하다.(21편) ‘못골 연작’을 통독한 후 맨 먼저 떠올린 이름은 질 들뢰즈, 아니 ‘리좀’ 그러니까..

2

‘못골 연작’은 ‘리좀’이다.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1) 예컨대 “할머니가 구부정히 꽃 속에서 걸어나와”2) “야야 니가 그새 이르케...../ 엊그제 내가 너를 받은 거 거튼디....”3),라고 말씀하실 때 연작 중간에 위치한 ‘못골9’는 마지막 ‘못골 연작’ ‘못골21’을 연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걸어온 길들이 스르르 몸을 숨기고 어디만치 왔니 차돌멩이 돌았다 모새방 지났다 어디만치 왔나 나를 내려놓은 할머니가 둥근 달무리의 문을 열고 가뭇없이 달 속에 들어가 앉으”4)실 때 ‘못골21’을 경유해 ‘못골9’를 건네받은 ‘못골1’이 문을 닫는다. 물론 ‘못골9’는 자체 완결의 형식을 띠고 있어 앞 물음을 스스로 열고(“할머니가 구부정히 꽃 속에서 걸어나와”) 스스로 닫는다.(“할머니다 망태기 메고/ 꽃무더기 속으로 들어간다”(<곡우 지나고-못골9>)

이렇듯 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끝이 없고 시작이 없다. 시작하는 순간 끝나고 끝나는 순간 시작한다. 이야기는 오로지 ‘순간’으로 떠돌고 ‘순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가 동사(‘~이다’)를 부과할 때 리좀은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앞의 책) “이 접속사 안에는 <이다>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는가? 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 없는 물음이다.”(55쪽)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 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여행 또는 운동에 대한 거짓 개념을 함축한다.”

하지만 ‘못골 연작’은 이와 달리 “여행하고 움직이는 다른 방법을 갖고” 있다. “그것은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과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고 끝내지 않”는다. 이를테면 ‘못골19’는 송진권이 시로 쓴 리좀론이다.

뭐라 말해야 하나
그 저녁에 대하여
그 저녁 우리 마당에 그득히 마실 오던 별과 달에 대하여
포실하니 분이 나던 감자 양푼을
달무리처럼 둘러앉은 일가들이며
일가들은 따라온 놓아먹이는 개들과
헝겊 덧대 기운 고무신들에 대하여
김치 얹어 감자를 먹으며
앞섶을 열어 젖을 물리던
목소리 우렁우렁하던 수양고모에 대하여
그 고모를 따라온 꼬리 끝에 흰 점이 배긴 개에 대하여
그걸 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겨운 졸음 속으로 지그시 눈 감은 소와
구유 속이며 쇠지랑물 속까지 파고들던 별과 달
슬레이트지붕 너머
묵은 가죽나무가 흩뿌리던 그 저녁빛의
그윽함에 대하여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저녁의
퍼붓는 졸음 속으로 내리던
감자분 같은 보얀 달빛에 대하여

- 송진권 <그 저녁에 대하여-못골19>

뭐라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그는 ‘시작’에 가두지 않고 ‘끝’으로도 주워담지 않는다. 어간 ‘하’에 연결 어미 ‘어’를 이어 붙여 오로지 ‘대하여’의 방식으로 시를 지연시킨다. 다시, 상기할 것. “그것은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과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고 끝내지 않”는다.(송진권이 백석의 계보에 놓인다면 토속어 구사 또는 신화나 옛이야기, 구음 때문이 아니라 詩作의 유사성에서 비롯된다.)

‘못골 연작’은 “사물들 사이를 움직이고, 그리고의 논리를 세우고, 존재론을 뒤집고, 기초를 부숴 버리고, 시작과 끝을 무화시키는 법을 알고 있”다. 알려진 것처럼 “중간은 결코 하나의 평균치가 아니다. 반대로 중간은 사물들이 속도를 내는 장소이다. 사물들 사이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가거나 그 반대로 가는 위치를 정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와 다른 하나를 휩쓸어 가는 수직 방향, 횡단 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출발점도 없고 끝도 없는 시냇물이며, 양 쪽 둑을 갉아내고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

3
나는 ‘못골 연작’ 스물한편을 그렇게 읽었다.

1)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2001, 새물결, 54쪽
2) 송진권 <곡우 지나고-못골9>
3) 송진권 <켄터키 옛집에-못골21>
4) 송진권 <달 속의 할머니-못골1>

by 파란 | 2018/09/02 20:00 | 파란의 포에지(poesie:詩) | 트랙백 | 덧글(0)
[송진권 읽기4] 沿革
[송진권 읽기4]  沿革

1
무의식이 발동한다. 송진권을 읽으며 내 촉수가 맨 먼저 가 닿은 곳은 박재삼이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천년의 바람>(1975)을 펼치니 <수창가>, <어지러운 혼>, <울음이 타는 강>, <추억에서>, <봄바다에서>, <무제>, <무봉천지>, <한 산수화가>, <남해안 언덕들>, <천년의 바람>, <옹기전에는>, <어떤 제사>가 무작위로 펼쳐진다. 그리고 이시영. 그가 스물 여덟에 펴낸 <만월>(1976)을 펼쳐드니 눈에 거슬리는 단어들이 한가득이다. 시대정신이려니 하기엔 설익은 시편들이 너무 많다. 나는 겨우 <후꾸도>, <새벽 들>, <어느 변사>, <만월>에 눈길을 주고 이 시편들마저 없었더라면 <만월>은 망했지 싶은 생각. 최하림의 <우리들을 위하여>(1976)은 어떤가. 상황이 어슷버슷한 게 <나의 말>, <나무 아래 앉아>를 제하면 읽을만한 시가 거의 없다. 조태일의 <가거도>(1983) 역시 매한가지여서 <1980년대의 마음들>, <가거도>, <깨알>, <원달리의 아버지>, <오동도>를 제외한다면 시집 자체가 상투적이고 드라마트루기로 가득하다. 곽재구의 두번 째 시집 <전장포 아리랑>(1985)은 어떤가. 앞선 시집들과 달리 추호의 의심없이 걸작이다. 첫번 째 시집 <사평역에서>(1983) 이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두 시집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 <전장포 아리랑>을 다시 읽었다. 예컨대 <별들의 노동>, <불기둥>, <압록국민학교>, <별>, <무지개>, <받들어 꽃>, <김소월을 가르치다 보면>, <전장포 아리랑>, <다산 초당 가는 길>, <외삼촌>, <진 뮤셀만 부인에게2>, <춘례>, <그 해 겨울>, <한국은행 앞에서>, <四鬼辭說> 같은 시들은 걸작이다.(하지만 3부가 시작되자 곽재구는 급격하게 시적 동력을 잃고 만다. ‘자유’와 ‘사랑’이 시에 넘쳐나기 시작하는데 과유불급이다. 그럼에도 5부에 배치된 40여쪽에 달하는 장시 <四鬼辭說>은 반드시 재평가 되어야 하리라.) 죽은 윤중호의 두번 째 시집 <금강에서>(1993)를 이어 읽었다. 물론 이전 시집 <본동에 내리는 비>(<1988>)는 80년대 시집을 거론할 때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는 시집이다. 윤중호는 첫시집이 주는 하중을 두번 째 시집에서 가뿐히 뛰어 넘는다. 송진권처럼 윤중호의 고향도 옥천이다. 윤중호를 생각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시인이 임길택이다. 그의 시집 <탄광 마을 아이들>은 눈물 겹다. <본동에 내리는 비>에서 내가 추린 시는 <질경이5-경운이 성님>, <질경이9-전임 선산부 김씨>, <한철이 아저씨>, <양화대교를 지나면서-1993년 3월. 살아 남은 자의 슬픔>, <노래2>, <노래3>, <이주 단지에서1>, <이주 단지에서2>, <이주 단지에서 다시 이주 단지로>, <구장터 외할아버지>이다. 이건청으로 넘어가자. <석탄 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2000)을 나는 기억한다. 특히 ‘석탄 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 연작 여섯 편 그리고 ‘파르티쟌’ 연작 네 편은 2000년대의 시작과 함께 이건청이 자신의 건재를 알린 기념비적 시편이다. 시집 첫 시에서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사북 가는 길 아세요?”(<사북이 어디예요?>)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2
송진권의 두번 째 시집 <거기 그런 사람이 살았다고>(2018)는 이 모든 시집들을 실천적으로 잇겠다는 듯 혹은 계승하려는 듯 그렇게 쓰여졌다.

by 파란 | 2018/09/02 19:55 | 파란의 포에지(poesie:詩) | 트랙백 | 덧글(0)
[송진권 읽기3] 어떤 지연
[송진권 읽기3] 어떤 지연

1
송진권이 고향의 미물과 풍속과 역사와 언어와 세속을 채록해 묶은 <거기 그런 사람이 살았다고>(2018)는 드물게 고귀하고 아름다운 시집이다. 로컬에 뿌리박은 모국어를 음미할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를 줄 뿐더러 삶과 시가 不二임을 문자로 밝혔다. 연혁을 살펴야 한다. 오래 전 조재도(<그 나라>)가 개간해 밭을 일구고 같은 충청도 시인 신미나(<싱고,라고 불렀다>)가 씨뿌리기를 마친 그 땅에 첫 소출을 낸 이가 송진권이다. <거기 그런 사람이 살았다고>는 시로 쓴 자서전이고 충청도 史草이다. 시인이면서 사관인 자. 거칠게 시작해보자.

2
달이 뜬 낮과 해가 뜬 밤이
여러 날 여려 해 흘러가버렸고
우리에서 뛰쳐나온 마소가 집 안을 다 헤집어놓고
안방까지 차지해버렸고
수탉이 암탉이 되고
흰 점이 검어졌으며
열 개 스무 개 백 개 천 개의 해가 떠서 지글거리고
큰물과 큰불이 번갈아 나서
쑥대밭이 되었고
이제 세상엔 우리만 남았고
아빠는 어디로 가고
엄마도 아빠를 찾아 어디로 가고
나는 우는 동생을 다독여 재우는데
열 밤만 자면 엄마랑 아빠가 오실 거야
자장자장 울지 마
고양이 새끼는 죽었잖아
자장자장 우리 애기
이불을 덮어주고 토닥이며
자장가 불러주는데
어른들은 언제나 오실까
열 밤 스무 밤이 지나가고
셀 수 없이 많은 열 밤이 지나갔는데

- 송진권 <어른들은 언제나 오실까>


3
시집은 질문으로 시작해(<어른들은 언제나 오실까>) 먼 길을 우회한 끝에 그에 대한 답변으로 끝난다.(<어른들이 돌아왔다>) 김수영이 <오랜 밤 이야기>(2000)에서 밝혔 듯 어른들이 없는 세상은 동화 속 세상이다. 아이들은 동화 속 세상이 즐겁다. 송진권은 동화를 슬그머니 농경사회로 둔갑시키지만 그가 만들어낸 공간은 결국 동화로 수렴된다. 그럼에도 그의 시들이 동화와 농경사회를 갈마들 때 판타지와 신화는 서로를 내세우지 않는다. 아이들이 동화 밖으로 걸어 나갈 때 동화는 끝난다.(“어른들이 돌어왔어요/ 이제 이 집에서 나가야 해요”) 하지만 시인은 동화 속 세상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다. 어떤 유예의 시간. 시인은 지연을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시집의 얼개를 짰다. 시집 마지막 시에서 “어른들이 돌아왔다”라고 대답하고 재빠르게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어른들은 언제나 오실까”라고 묻기 위해 그는 대답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빠는 어디로 가고/ 엄마도 아빠를 찾아 어디로 가고” “이제 세상엔 우리만 남았고” “열 밤만 자면 엄마랑 아빠가 오실 거야” “나는 우는 동생을 다독여 재”워야 하고 하지만 오지 않고 “열 밤 스무 밤이 지나가고/ 셀 수 없이 많은 열 밤이 지나”가고..지연의 지연. 아이는 ‘열 밤’이 무한하길 바란다. 송진권은 아이의 바람에 자신의 바람을 슬쩍 겹쳐 놓는다. 그의 바람은 무엇인가. <거기 그런 사람이 살았다고>에 실린 쉰 여섯 편의 시에 시인의 바람이 빼곡한데 그는 본토 아비 집을 떠나고 싶지 않다. 이것은 아이러니인데 본토 아비 집에 조금 더 머무르기 위해 어른들의 귀환을 지연시켜야 한다. 어른들이 돌아오면 모든 것들은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이 방에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수건 툭툭 털며 방 안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어요”(<어른들이 돌아왔다>) 아이는 두렵다. “어른들은 언제나 오실까”라고 묻던 (동화 속 세상) 아이의 속내는 “어른들이 돌아왔다”가 허언이길 바라요,인데 감수성 충만한 충청도 사내는 “방에 들여놓았던 개와 시렁에 앉은 닭”과 더불어 동화 속 세계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다.

4
어른들이 돌아왔어요
소를 몰고 후치 짊어진 아버지와 
소쿠리 그득 나물 이고 엄마가 왔어요
소는 외양간에 매고 후치는 헛간에 두고
소쿠리에 든 것을 부엌으로 가져가 엄마는 저녁을 안쳐요

어른들이 돌아왔어요
우리가 이 방에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이제 우리는 우리가 쏟은 들깨 같은 말들을 위해
개미들을 풀어놓고
엉클어진 옷가지와 이불들을 차곡차곡 개어놓아야 해요
방에 들여놓았던 개와 시렁에 앉은 닭은 제자리에 돌려놓고
어서 저녁 먹으라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달의 한숨과
부리에 서리 묻은 까마귀와
우리에게 자꾸 죽었다고 말하던 아이도 집에 돌려보내야 해요

어른들이 돌아와서
샘에서 낯을 씻고
수건 툭툭 털며 방 안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어요
어른들이 돌아왔어요
이제 이 집에서 나가야 해요

- 송진권 <어른들이 돌아왔다>
by 파란 | 2018/08/24 14:33 | 파란의 포에지(poesie:詩) | 트랙백 | 덧글(0)
[송진권 읽기2] 그늘
[송진권 읽기2] 그늘

‘어슴푸레한데’(<어슴푸레한데>)는 어디인가. 그곳은 “환한지도 어두운지도 모르는”(<햇빛구경>) 곳이다. ‘어스름’(<시래깃국>)이 낮게 깔리는 곳이다. “올뱅이 껍질을 타고 내려가다 헛디뎌 미끄러진 제일 깊고 후미진 데”(<우리 동네>)이다. 그곳은 어디인가. “희디흰 곳이거나 검디검은 곳”(<비 들어오신다>)이다. 그곳은 “찬물구딩이 찬물구뎅이”(<찬물구덩이의 물>)로도 불리고 “찬물샴 찬물샘 찬물웅덩이 찬물웅뎅이 찬물 소”로 불리는 곳이다. 그곳은 “붉나무 붉은 잎 늘어진 데”이고 “무당개구리 뜬 물을 거슬러서 미나리 고나리 헤집고 머위잎 디디며 올라가면 있”다. 또 그곳은 어디인가. “재 속에서 가뭇거리는 것들이 다 살아나오는”(<일락서산>) 곳이다.

어둑시니들의 수런거림이 절정에 다다를 즈음 그곳에 “밤이 오면 마루 밑이며 처마 그늘 가죽나무 그림자며 아궁이 속 헛간 속이며 둿간에까지 숨어 살던 귀신들이 스멀스멀 일어서서 기어 나와 툇마루를 삐걱이며 걸어 다니기도 하고 슬레이트 지붕골을 타고 무엇이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며 횟대 위에서 잠든 닭의 똥구멍에 손을 넣어 파먹기도 하며 살강 위에 엎어놓은 사기그릇을 떨어뜨려 박살을 내놓고 쏜살같이 밖으로 내빼”(<외갓집-백석풍으로>)기도 하는 것인데 그곳에 밤이 오면 “달아나다 풍덩 샘가에 물 받아놓은 펀지기에 빠지기도 하며 가죽나무 가지를 뚝뚝 분지르기도 하”고 “천장에선 밤새 무엇이 뛰어다니고 구르고 짹짹거리고 몸이 뱀같이 늘어나서 아무리 작은 구멍이라도 있으면 드나든다는 족제비가 토끼장에 들어가서 대가리만 남기고 토끼를 뜯어 먹기도 하고 놓아먹이는 우리 집 개가 쥐약을 먹고 들어와서 밤새 마당을 구르다가 낑낑대디 먹은 것을 다 게워내고 눈에 퍼런 불을 켜고 이빨을 드러낸 채 숨을 몰아쉬다가 혀를 빼물고 늘어져버리기도” 한다. 그곳에서 “나는 이불을 들쓰고 사시나무 떨듯 하며 조그만 소리에도 놀라 오줌보가 탱탱히 부풀어도 밖엘 못 나가고 요강에 쪼그려 앉아 외할머니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곳은 “깜깜 이무 것도 없는 그런 데”(<물뱀>)이다. 하여 그곳은 “소의 배 속”(<소의 배 속에서>)에 가까운데 “달이 뜬 낮과 해가 뜬 밤이/ 여러 날 여러 해 흘러가”(<어른들은 언제나 오실까>)면 마주칠 수 있을까. 그곳. 이를테면 그곳은 다니자키 준이치로 식으로 말해 ‘그늘’(<죽은 줄도 모르고>)이다. 
by 파란 | 2018/08/24 13:58 | 파란의 포에지(poesie:詩) | 트랙백 | 덧글(0)
[송진권 읽기1] 개구리와 나
[송진권 읽기1] 개구리와 나

싸리 꽃잎 날려
물 가둔 논에 점점 내리는 밤입니다
밥풀처럼 싸리꽃 둥둥 뜬 밤입니다
대가리며 입술이며 포르족족한 뺨이며에
꽃잎 묻는 개구리들 와글와글대는 밤입니다

무엇이든 가둔다는 것은 얽매고 속박하는 일이라
꺼려했지만
물 가둔 논 보니 알겠습니다
낮 동안 데워진 물이 미지근해서
파르르르 꽃잎 흩은 물속에서
두 서너 놈이 서로 끌어안고
쫓아내고 쫓아가고
울음주머니 부풀리며
우리가 온밤 내 찾아 헤맨 곳이 여기였음을
1)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초여름밤 물 가둔 논 속 한 마리 개구리이고 싶습니다. 와군2)들이 왁왁대는 이치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초여름밤입니다. 

그 열락의 정점에서 행위 끝낸 몸뚱이처럼 늘어져
머리카락 쓸어 올리며 맺힌 땀을 닦고
괜찮아 할 때의 그 쓸쓸하던 눈망울처럼
차르르 별들은 뿌려져
꼬리 치며 춤추며 저 어두운 속으로 헤엄쳐 가서
물 가둔 논에 맘껏 알을 슬어놓는 밤입니다
물꼬 터놓는 밤입니다.
3)

1) 송진권 <물 가둔 논>
2) 와군蛙群은 개구리떼입니다. 
3) 송진권 <물 가둔 논>  
by 파란 | 2018/08/24 13:53 | 파란의 포에지(poesie:詩) | 트랙백 | 덧글(0)
[시읽기/시일기] 물과 불2
[시읽기/시일기] 물과 불2

때로는 목동의 짐승들이 나가는 새벽을 기다리는
광채 없는 불, 또 다른 별
이 우물 속으로 두레박 내려갈 때
너는 내벽에 부딪치는 쇠사슬 소리 듣는다.

 - 이브 본푸아 <우물> 부분

우물은 깊고 어두컴컴해 보이지 않으며 바닥을 모른다. 유형진 역시 '雲井' 연작을 통해 '우물'의 속성을 간파한 바 있다. 유형진에게 '우물'은 "유리처럼 투명하고, 서리처럼 뾰족하고, 공중에서 깨지고, 흩어지고, 흩어져서 날리고, 날려 사라지는. 급기야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 없는"(유형진 <雲井6>) 곳이다. 흐트러지는 '구름우물'(雲井)을 보라. 유형진에게 '우물'은 수직이 아니다. 유형진의 언어 안에서 모든 물은 수평으로 흐른다. 흐르면서 물주름을 일으키고 스스로 변이에 이른다. '물주름'은 단순한 합성어가 아니다. 그것은 물의 동사적 몸짓이고 자체로 생성이며 시적 은유이다. 이를테면 시적 분화. 그것은 사건이다. 반복의 몸짓이지만 차이를 불러 일으킨다. 그것이 주름이다. 유형진의 언어 파동은 퍼지면서 오무라들고 오무라들면서 퍼진다. 유형진이 파동을 일으키는 물주름에 귀를 기울일 때 이브 본푸아는 우물 내벽에 부딪치는 쇠사슬 소리를 듣는다. 본푸아는 말한다. "그러나 우물 바닥에는 늘 물이 고여 있고".(<우물>) 바닥에 고여 있는 물, 하지만 너무 깊어 볼 수 없고 시인은 다만 듣는다. 우물 내벽에 부딪치는 쇠사슬 소리를 듣는다. 물주름이 퍼지고 우물 내벽에 소리가 메아리친다. 유형진이 옆을 볼 때 이브 본푸아는 아래를 듣는다.

옆. '옆'은 내게 익숙하다. 그것은 문태준의 언어다. 문태준이 "물 속에 돌을 내려놓았다/ 동쪽도 서쪽도 생겨난다/ 돌을 하나 더 내려놓았다/ 옆이 생겨난다/ 옆에 아직은 없는 옆이 생겨난다"(<징검돌을 놓으며>)고 말할 때 '옆'은 수평이었다. 하지만 문태준의 수평은 평평한 수평이고 나란한 수평이었다. 유형진이 울퉁불퉁한 수평을 은유로 실어 나를 때 문태준의 수평은 말그대로 축자적 행위에 가깝다. 이를테면 그것은 일종의 퍼포먼스였던 셈. 문태준의 맨발이 돌을 적신다. "물 속에 돌을 내려놓았다". 문태준의 옆 역시 시적 분화이고 '돌'을 매게 삼아 시적 장소의 새로운 탄생을 알렸다. 유형진의 수평은 전혀 다른 수평이다. 유형진도 물속을 응시하지만 축자적 의미를 넘어 아날로지에 물을 담아낸다. 형질 변환. 장소의 되기. 주름들. 다른 수평.

본푸아의 물은 문태준과도 다르고 유형진과도 다른데 한 시인이 옆을 응시하면서 곁을 만들어내고(문태준) 다른 한 시인이 파동하는 '물주름'에 몸을 싣고 오물딱 오물딱 항해에 나설 때(유형진) 이브 본푸아는 우물을 갱도 삼아 깊이 파내려간다. "그러나 우물 바닥에는 늘 물이 고여 있고/ 별은 늘 그곳에 봉인되어 있다."(이브 본푸아 <우물>)

by 파란 | 2018/08/03 00:20 | 파란의 포에지(poesie:詩) | 트랙백 | 덧글(0)
[시읽기/시일기]물과 불1
[시읽기/시일기] 물과 별1

"물속에 나타난 검은 점/ 점은 점점, 점점 커져가고/ 점은 물고기가 되고/ 산호가 되고 불가사리가 되고/ 불가사리, 영어로는 별물고기/ 별물고기에게 불가사리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지어준 사람은 누구일까요"(유형진 <피터 판과 친구들-에피소드 10>) 물론 그는 시인이다. "별물고기에게 불가사리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지어준 사람"은 시인이다. 시인의 언어모음집 안에서 "물속에 나타난 검은 점"은 '물고기'였다가 "불가사리'였다가 '별물고기'가 된다. 유형진의 상상세계 안에서 그 넷은 하나이다. 유사한 방식으로 시인은 <雲井5>에서 '러시아 인형'의 눈을 보면서 "반짝거리는 모래시계의 모래알"을 떠올리고 '별'을 불러내기에 이른다. 동어반복. 유형진의 상상세계 안에서 그 셋은 역시 하나다. 넷은 하나였다가 셋이였다가 다시 하나가 된다. 시적 분화. 은유들. 유형진에게 '별'이 시적 은유라면 이브 본푸아에게 '별'은 시적 암시다. 유형진이 '물속'에서 '별'을 볼 때 본푸아는 '우물' 속에서 별을 본다. 두레박을 타고 우물 속으로 내려가는 본푸아를 보라.

때로는 목동의 짐승들이 나가는 새벽을 기다리는
광채 없는 불, 또 다른 별
이 우물 속으로 두레박 내려갈 때
너는 내벽에 부딪치는 쇠사슬 소리 듣는다.

 - 이브 본푸아 <우물> 부분
by 파란 | 2018/08/02 18:56 | 파란의 포에지(poesie:詩) | 트랙백 | 덧글(0)
[시읽기/시일기, 18/6/3] 체온
[시읽기/시일기, 18/6/3] 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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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물살이 떠는 물살에게 불어주는 한밤의 입김"(<체온>)이란 뭘까.1) 삼심년 전 일을 떠올리며 시인은 또 이렇게도 말한다."웃어나 줄 걸 따듯하게 손이나 잡아줄 걸/ 그까짓 여자 남자가 뭐라고 죽고 나면/ 썩어문드러질 몸땡이 그까짓 게 다 뭐라고"(<벽 너머 남자>) "이것이 다 사랑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렇게 누워 있"고, 아마도 그 때문이겠지, "냉갈 든 방이 살아나고 있"구나.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걸 잊지 말자. 연인들의 한숨어린 고백이 눈물겹다. "사랑아, 우린 껴안은 채 이별할 수 있겠구나"

2
인용한 두 편의 시는 2부 맨 앞에 배치되어 있고 삼십년 전 일을 떠올리며 쓴 시(<벽 너머 남자>)에 화답하듯 <체온>을 이어 썼다. 두 편을 연달아 읽고나니 시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우리 후회하지 말고 맘껏 서로가 서로를 향해 살을 내줄 일이다. 이것은 시인의 정언 명령!

1) "떠도는 물살이 떠는 물살에게 불어주는 한밤의 입김", 시인의 말마따나 물론 그것은 '체온'이다. 시를 읽자 몸이 뜨끈해진다. 더군다나 '물살'이라니. 내 몸의 살이 네 몸의 살에게로 건너가는 일이 기적 같다.





by 파란 | 2018/02/23 06:37 | 아이의 얼굴 | 트랙백 | 덧글(0)
[아이의 얼굴620] 졸업식 풍경14
 
[아이의 얼굴620] 졸업식 풍경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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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않은 네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동안 너와 나의 등 뒤로 세상도 잠시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내가 살던 집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고, 꽃들이 피었다 졌다 한다. 그렇게 계절이 몇 번을 왔다 가는 동안 시소를 탄다. 이 세계는 내릴 수 없는 세계. 그러는 동안 저녁이 오고, 밤이 오고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자란다."(이승희 <시소의 세계에서 우리는> 인용)

2
내가 앉으면 네가 붕 떠오른다. 그것이 시소의 원리다. 네가 앉을 차례다. 내 몸이 허공에 들린다. "균형은 움직일 때만 존재하는 질서", 그래 그것은 시인의 말이야. 우리는 스스로 공평하다. 네 품에 안긴 꽃다발에 목화가 폈다. <도깨비>를 너무 많이 본 탓이겠지. 그래도 괜찮다. 연곡해변이든가, 안목해변이든가, 지난 봄 나는 아빠와 그곳을 찾았더랬다. 햐안 물보라가 부서지는데 연인들이 수줍게 서있더라. 하얀 물보라를 닮은 목화가 플래시 소리에 팡팡 터지고 바다갈매기가 먼 바다를 향해 나는데 목화의 운명을 나는 희미하게 예감했더랜다. 너를 지나치겠다. 내 등 뒤에서 너는 수평을 맞춰 행진해야 하리라. 그래, 말해보자. "어디서나 시소의 세계는 시작된다. 어제의 시소는 녹슬고 오늘의 시소는 이미 낡았다. 꽃 피는 집들은 이제 없다." 졸업은 뭘까. 그것은 끝일까, 다른 시작일까. 어제는 끝일까 시작일까. 오늘은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니다. 마주 선 네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동안 너와 나의 등 뒤로 세상도 잠시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이별의 시간, 하지만 새로운 만남을 꿈꾸는, 아니 그 둘은 진실이 아니야. 진실은 너와 나의 등 사이에 있지. 아슬하게, 균형이, 그곳에, 그래 우선 우리 한 발 앞으로 내딛자. 

by 파란 | 2018/02/23 06:18 | 아이의 얼굴 | 트랙백 | 덧글(1)
[아이의 얼굴619] 졸업식 풍경13

 
[아이의 얼굴619] 졸업식 풍경13

“(...)
그래도 여기 좀 있을게
그냥 조금만 더

노래가 끝나면
바다 너머로 기린을 보러 갈 거야
(...)”1)

2
노래가 물처럼 흐른다. 너는 펭귄, 나는 돌고래, 우리 같이 기린 보러 가자. 시간은 누구 편일까, “여기 좀 있을게 그냥 조금만 더”, 시간은 째각째각, 난 하마를 볼거야, 하마라니, 기린 대신 하마, 그래 하마를 보러 가자, “노래가 끝나면” 점수가 나올까, 백점 먹고 하마 보러 가자. 노래는 돌림노래, 펭귄들아 돌고래들아 쉬지 말고 노래를 부르렴, 시간은 아직 우리 안에, 물처럼 시간은 흐르겠지, 나는 펭귄 너는 돌고래, 우리 같이 노래 부르자.

1)이승희, ‘시인의 말’,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7, 문예중앙
by 파란 | 2018/02/15 07:25 | 아이의 얼굴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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