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선생은 내가 아는 한, 인도의 아룬다티 로이에 필적하는 '행동하는 지성'이다. 그가 1978년에 펴낸 [시와 역사적 상상력]을 구하기 위해 서울 시내에 산재한 수많은 헌책방을 순례했던 기억이 내게 있다. 1999년 그는 두 번째 저작을 펴낸다. '인간 흙 상상력에 관한 에세이'란 부제가 붙은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이 그것이다. 그 책은 90년대 후반 무렵, 당대출판사로부터 바톤을 넘겨받아 [당대비평]이란 헌걸찬 인문잡지를 펴내던 삼인에서 출간됐다. 삼인은 '동시대인 총서'를 기획하며 김종철 선생에게 원고를 받아내기에 이른다. 첫번째 저작과 두번째 저작 사이에 21년의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을 함부로 지나쳐서는 안된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펴내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던 것 같다. 신분상의 변화도 뒤따른다. 영남대 영문학과 교수였던 그는 '녹색평론'의 발행인으로 신분상의 이동을 한다. 그 이동 역시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을 말해던 가라타니 고진과 다른 맥락에서 그는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그는 문학평론가의 직함마저 버린다. 그 무렵, 그는 삶이 부과하는 근본적인 아포리아를 붙잡고 씨름을 벌였던 것 같다. 그 결과물이 '녹색평론'으로 드러난다. 삼인이 어떻게 선생으로부터 원고를 받아냈는지 아직까지 의문으로 남아 있다. 삼인에서 기획한 '동시대인 총서'의 첫번째 저작은 김우창 선생이 쓴 [정치와 삶의 세계]이다. 내게 구십년대 후반은 당대에서 펴낸 '당대총서'와 더불어 삼인의 '동시대인 총서'로 깊이 각인되어 있다. '당대총서' 첫번째 책은 송두율 선생의 [역사는 끝났는가]이다. 나는 그 책을 연탄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정읍집에서 스물일곱살 무렵 읽었다. 말하자면 송두율과 김종철은 내게 '리영희'였던 셈이다. 대학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내게 그들을 읽으며 보냈던 그 시절은 황금기였다. 집단지성이 불가능했던 그 시절, 그들은 홀로지성의 전형을 내게 보여줬다. 남한에서 김종철 선생만큼 래디컬한 지성이 있는가. 과문한 나는 그 이상을 알지 못한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번역하고 펴낸 이도 선생이다. 나는 기념비적인 그 저작을 입사한 그 해, 방배동 판자집에서 읽었다. 1996년 여름의 일이다. 녹색평론사에서 두번째로 펴낸 책이 지금은 고인이 된 권정생 선생의 [우리들의 하나님]이다. 그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새벽을 맞았던 1996년 겨울이 오롯히 남아 있다. 그는 신비평에 사로잡힌 자가 아니었다. 삶은 비평도 아니고 해석도 아님을 선생은 이른 나이에 간파했던 것 같다. 서점 가판대에서 [녹색평론]을 마주대하면 나는 매 번 빚진 자의 마음으로 송구스러움을 느낀다. 내 마음 속에 선생이 있다면 그 맨 윗자리에 그의 이름이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시인은 '全速力'(장석남)으로 나아가는 자이다. 그는 모든 사태 앞에서 '즉각' 행위하고 '이미' 행위한다. 그의 행위는 비행위인데 '즉각'과 '이미'는 이를테면 "무위를 넘어가는 행위'(장석남)이다. 행위가 무위를 넘어갈 때 속도는 속도가 아니다. 이제 비속도가 유일한 시인의 속도이다. 언어 위에 얹힌 시인이 질주한다. 장석남이 질주한다. 첼란이 질주한다. 김종삼이 질주한다. 슌타로가 질주한다. 박정대가 질주한다. 바예흐가 질주한다. 심보선이 질주한다. 보들레르가 질주한다. 이경님이 질주한다. 송승환이 질주한다. 질주하는 시인들이, 나란히, 全速力으로, 속도를 잊고, 속도에 실려 질주한다.
그들의 지향점은 뭘까? 지향점을 두지 않는다는 게 그들의 지향점일지도 모르겠어. 그런 한에서 그들의 문학적 스승은 소설가 이인성이지. 가령 이준규의 시 <삼척>은 그들 '루' 동인이 이인성과 함께 떠난 여행기야. 이준규블로그에서 그 여행기록을 읽은 적이 있어. 아마, 어쩌면, 그 여행 자체가 시였는지도 모르겠어. 그들 '루' 동인은 세상이란 '고도'(사무엘 베케트)에 내던져진 문학망명자들의 모임 같단 생각이 들어. 한편, 그들 한 명 한 명이 퀼트가 되어 단성이 아닌 이중의 목소리 삼중의 목소리 사중의 목소리 오중의 목소리,,,,를 내고 있단 생각도 들지. 가끔 그들 동인은 시내 모처에 모여 공연도 하는데 최근엔 시인 강정과 함성호의 이름도 보이더군. 강정은 이준규의 세번째 시집 <삼척> 뒷표지에 표사를 쓰기도 했지. 그들은 그렇게 따로 또 같이 혹은 같이 또 따로 그러니까 그게,,, 이 기나긴 목록에 또 한 사람을 추가하고 싶어. 소설을 쓰는 정영문. 이준규는 '시인의 말'을 쓰면서 정영문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하염없이'란 말. 그건 정영문의 소설 <중얼거리다>와 <하품>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여. 정영문은 최근 문지에서 <어떤 작위의 세계>를 펴냈지. 그가 생각하는 '작위'란 뭘까. 정영문은 세상이 하품 같단 생각을 하는 것 같아. 그래서 그는 소설이란 양식을 통해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지. 그가 지면에서 하는 '작위'란게 하품 아니면 중얼거림이야. 그게 전부지. 그들은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그들은 '루'란 이름으로 모여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그들은 자신들만의 아케이드를 쌓고 싶어해. 그게 그들의 야망이라면 유일한 야망일거야. 근데 그게 가능할까? 그들은 극점을 추구하는데 사람들은 극점에 오르길 꺼려해. 그들의 문학하기는 놀이 같단 생각도 들어. 언어를 주물거리는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들. 장 비고의 첫장편 <품행제로> 마지막 장면이 생각나. 기숙사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 베개를 집어던지고 매트리스를 끌어내리고 베개 속 오리털을 흩날리는 아이들의 유희. 자고 있는 기숙사 사감을 침대에 묶는 반란. 기념식 행사장에 나타나 야유를 보내는 학교 지붕 위의 아이들. 그 모습들 속에 루 동인들의 천진한 모습이 어른거린다면 과장일까. 아무튼 그런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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