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주에서 실비아를 찾아 헤맸다.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그녀를 찾아,,,

by 파란
[송진권 읽기11] 아이와 나


[송진권 읽기11] 아이와 나


우리는 엄청나게 아주 중요한 일 때문에 그런 작은 것에 신경 쓸 틈이 없어 그깟 채송화야 밟히면 어떻고 개미들이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면 어때 염소 떼가 밭을 뭉개고 닭들이 집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면 좀 어떠냐고 지금 너무 바쁘다니까

제발 엉뚱한 소리 그만하고 저쪽으로 좀 가 줄래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야 도무지 다른 것엔 신경 쓸 틈이 없다니까 매미가 허물을 못 뚫고 나오는 거 따위나 병아리 한 마리 태어난 건 아무것도 아니야


왜 이래, 그깟 늙은 개 한 마리 죽은 거 가지고 눈물이나 흘리다니 부끄럽지도 않아 시간 없단 말야 아주 중요한 일을 하러 나가야 한다니까 엄청나게 아주 중요한 일 때문이라니까

 - 송진권 <엄청 아주 중요한>

아빠 나랑 놀자! 돌림노래인 줄 알았다. 언제까지 계속될 줄 알았는데 (이것 역시 거짓말이지만) 이 말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하나마나한 소리지만)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고 어린 아이였던 아이는 자라 언젠가 어른이 된다. 나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면,, 아니 알았다 한들 무슨 소용 있었을까. 아이가 부를 때마다 나는 "엄청나게 아주 중요한 일 때문에 그런 작은 것에 신경 쓸 틈이 없"다고,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라고, "아주 중요한 일을 하러 나가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매질을 하곤 했다. (역시 하나마한 소리지만) 나는 내게 그리고 아이에게 너무 가혹했다. 나의 가혹함을 아이가 알리 없지. 아이는 작디작은 것들에게 온통 눈길이 쏠려 내 가혹함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은 내 시간 관념을 허무는 곳이었다. 나는 이렇게 바쁜데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우주 만화>(이탈로 칼비노)도 읽어야 하고 <나자>(앙드레 브르통)도 읽을 시간이 없는데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은 자주 내 시간을 압살했다. 아이가 여름선풍기 앞에 입 벌리고 앉아 아아아아, 거릴 때(송진권 <선풍기>) 나는 산본도서관에 있었다. 여름선풍기가 방 안에 말들을 토막 내고 깨뜨려 이상한 조합으로 흩어질 때 그 앞에서 아이는 자주 깔깔거렸다. 나는 어이없어하며 흩어진 말과 아이와 여름선풍기를 구경했다. 어떤 날은 아이가 방바닥을 뒹굴었고 책상 앞에 앉아 방바닥을 뒹굴며 부르는 아이의 노래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무 것도 하기 싫을 때는
아무 것도 하지 말아요

티브이도 켜지 말고
게임도 하지 말고
무엇도 되지 말아요

나는 나도 아니고
누구도 아니에요

어떤 생각도 내 속엔 없어요
이런 글도 쓰지 말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봐요

아무것도 하기 싫으니까
무엇도 되기 싫을 때니까

 - 송진권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그리고 아이는 자주 혼자 노래를 불렀다. 내키는 대로 아무 노래나 불렀다. 시간이 뭉텅이로 쏟아지는데 "할 일이 있어야지"(송진권 <노래나 불렀지>) 노래가 떨어지면 누구한테 빌려 불렀고 그것마저 동나면 혼자 노래를 지어 불렀다. 지어 부른 노래마저 끝나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아이는 창 턱에 손을 괴고 무작정 골목을 바라보아야 했다. 아이를 등지고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나는 무력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아이가 두려웠고 동시에 부러웠다. (없는) 환영처럼 (사라진) 돌림노래처럼 어디선가 아이의 노래가 들려온다.

난 이 집이 좋아
이 집 화장실 구석에서
이렇게 혼자 노래나 부르고 있지

 - 송진권 <노래나 불렀지>


by 파란 | 2021/09/11 22:12 | 파란의 포에지(poesie:詩)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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